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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곡리윤재
작성일 : 2026.02.1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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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 10?1 사건 당시 유혈 현장 사진. 장총을 가지고 있는 쪽이 경찰이다. 건너편 시위 군중 쪽에 총격을 받아 여러 명이 쓰러져 있다. 미 군정청 보고서에 따르면 1946년 말까지 이어진 이 사건으로 민간인과 경찰 170명이 사망하고 180여명이 부상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박정희와 김대중<11>
미 군정기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 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확 카카오야마토 산됐고 경찰과 시위대 간 유혈 충돌과 좌우익 폭력사태로 그해 연말 까지 양측에서 170여명의 사망자와 18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태는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대구 10?1 사건’으로 규정됐는데, 공교롭게도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 모두에게 사상적 굴레를 씌우는 계기가 됐다.
1 야마토게임하기 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민중 시위...박정희와 김대중에게 사상 굴레 씌우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는 해방 후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 구미지부장을 맡는 등 좌익 진영에서 활동했다. 좌익계열이 주도한 대구 사건의 불길이 경북 선산으로 번졌을 때 그는 선산경찰서와 구미면사무소 점거 선두에 섰지만 군중을 설득해 유혈사태를 막았다 바다신릴게임 . 그러나 타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 병력이 선산 지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교해 교육을 받던 박정희는 셋째 형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조용히 구미 집을 다녀갔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을 많이 도왔고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셋째 형의 죽음은 그에게 큰 온라인야마토게임 충격이었다.
박정희 셋째 형 박상희. 대구 10·1 사건 당시 경북 선산군 민전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선산경찰서 점거에 앞장섰지만 시위대를 자제시켜 유혈 사태를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타 지역 경찰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피신 중 사살됐다. 그 릴게임골드몽 의 죽음은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박준홍 제공
대구사범학교와 만주군 시절 박정희 주변에는 사회주의 좌익계가 많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기울지 않으면서 방관자적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셋째 형의 죽음은 그를 좌익 쪽으로 확 밀어버리는 계기다 됐다(조갑제, ‘박정희1’. 김삼웅, ‘박정희 평전’).
셋째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좌익에 가담한 박정희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끈 사람은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인 남로당 군사부(軍事部)책 이재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양 신학전문학교와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부를 나와 경북지역에서 목사로 사목 활동을 하다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좌우합작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경북도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입당했다(이재복은 박상희의 죽마고우로 박정희도 잘 아는 황태성과도 친분이 깊었다. 황태성은 대구 10?1사건 후 월북해 고위직을 역임했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남파돼 박정희를 만나려다 붙잡혀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이재복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준 인연으로 박정희에게 접근해 포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운현, ‘실록 군인 박정희’).
박정희는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졸업한 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춘천에 본부를 둔 8연대에 근무하던 시기에 이재복과 많이 만났다. 당시 8연대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었던 김점곤(조선경비사관학교 1기.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선후배 사이. 육군소장 예편) 중위는 박정희가 친척이라고 하면서 이재복을 술자리에 초대해 원용덕(중장 예편.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의 최상급자) 연대장과 자신에게 소개한 일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조갑제, 앞의 책).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황태성. 그는 사회주의자로 월북해 고위직을 역임했고, 박정희를 만나러 남파됐다가 체포돼 간첩죄로 사형당했다. 푸른 역사 제공
박정희는 대위로 진급한 뒤 1947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이 시기 박정희 1중대장과 산하 2구대장 황택림 중위, 강창선 2중대장과 산하 2구대장 김학림 대위 등 네 명이 모두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좌익 인맥은 대부분 만주군 시절 인연으로 엮여 있는데 남로당 활동이 활발했던 강창선은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고, 군 내의 남로당 두목급인 최남근은 만주군관학교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최남근은 박정희가 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일 때 대구에 주둔한 6연대장으로 있었고, 이때 박정희와 함께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을 만났다고 한다(조갑제 앞의 책).
박정희가 남로당 가입 등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 것은 1948년 11월이었다. 이재복이 거동 수상자로 붙잡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포섭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숙군 수사는 이재복에 이어 그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고 그를 통해 군내 좌익 명단을 통째로 손에 넣으면서 급진전됐다. 수사팀은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 부대를 돌면서 남로당 세포를 찍게 해 줄줄이 체포했다.
박정희가 남로당 조직도와 명단을 털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숙군 수사가 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정희를 구명하기 위해 수사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하면서 군내 좌익세포를 확인하는 과정에 박정희를 동석시켜 확인하도록 했다는 증언도 있어서 ‘박정희 명단’은 확인이 더 필요해 보인다.
남로당 군내 조직의 거물급이었던 박정희...군 수뇌부의 구명으로 회생
조사 결과 박정희는 남로당 군내 조직의 거물급이라는 사실이 확인됐으나 구체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군 수뇌부의 구명으로 회생할 수 있었던 데는 군내 남로당 조직 확인에 적극 협조했던 것 외에 이런 점도 감안됐다고 한다(김삼웅, 앞의 책).
1951년 10월 강원 양구군 펀치볼에서 미군과 국군 수뇌부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8군사령관, 클로비스 바이어스 10군단장, 백선엽 국군 1군단장. 백선엽은 박정희의 만주군 인맥으로 좌익 전력으로 어려움을 겼던 박정희를 구명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무기징역과 파면?급료 몰수형을 선고 받은 박정희는 군사재판 관할관인 육군참모총장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고, 동시에 형의 집행을 면제 받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한 박정희를 구해낸 것은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인맥과 미국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지낸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으로 알려졌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무보수 문관으로 일하다 6?25 발발 직후 정보국 소속 현역 장교로 복귀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은 그 후로도 그를 괴롭혔다. 군대에서 진급 때마다 거론되었고, 5?16 쿠데타 후에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 의심을 받았다. 그가 민정 전환 후 치러진 1963년 제 5대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상대당 윤보선 후보 측으로부터 거센 좌익 색깔 공세를 받기도 했다. 윤 후보 측은 그의 남로당 가입 전력과 황태성 사건을 거론하며 박정희를 곤혹스럽게 했다. 황태성은 재판 과정에서 간첩이 아니라 남북 접촉을 위한 밀사로 파견됐다는 주장을 계속했으나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바로 집행됐다. 그의 신속한 사형 집행은 자신에게 쏠리는 사상 의심을 털어내려는 박정희의 의중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박정희는 황태성 사형 집행 3일 후인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목포 파출소 방화 사건 주모자로 몰린 김대중
김대중에게도 10?1대구 사건의 파장이 미쳤다. 대구 사건의 영향을 받아 목포에서도 파출소를 습격해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누군가가 김대중이 주모자라고 밀고한 것이다. 우익단체 사람들이 출산을 앞둔 아내와 함께 처가에 머물던 김대중을 끌고 가 전모를 자백하라고 혹독하게 두들겨 팬 후 경찰서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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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101656000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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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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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03009410003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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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